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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맥서점/2020년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 채사장, 2019

최근에 이 책을 사서 읽던 도중에 같은 책이 한 권 더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 2년 전, 이 책을 서점에서 보자마자 바로 샀던 것 같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지대넓얕) 1, 2', '열한 계단'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신작을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문과 목차의 내용을 조금 보다가 왠지 '지대넓얕 2 - 철학, 종교', '열한 계단'의 내용을 다시 한번 우려먹는 것 같다는 생각에 책장에 꽂아 두었다가 그만 구매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새책으로 완독을 했다.

 2년전 우려는 그저 우려였다. 주제가 반복되는 것 같았지만 채사장은 이번에도 확실한 메시지,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고 찾아왔다. 어쩌면 지난 책들보다 더 명확한 하나의 메시지를 가지고 찾아온 것 같다. 메시지의 주제는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세계관'이며, 그 메시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깊은 사유의 결론은 '일원론'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장을 넘기며 궁금해졌다. 채사장은 자신의 말처럼 자신의 내면 안에서 찬란히 빛나는 세계의 실체와 마주했을까? 아니면 그저 많은 현인들의 깨달음을 잘 포장하는 '큰바위 얼굴'의 시인과 같은 사람일까?

 

당신이 언젠가 당신의 내면 안에서
찬란히 빛나는 세계의 실체와
마주하기 되기를 바란다.

 

<우주 - 세계의 탄생>

"우리 모두는 의식을 가진 인간이므로, 이 우주가 관측자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다." - 안드레이 린데, p.61

<인류 - 인간과 문명>

우주가 처음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것든 오직 인간의 의식과 사유 때문이었다. 기억해야 한다. 텅 빈 우주를 지켜보고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는 외부의 무엇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다. p. 114
21세기의 기술 발전과 함께 등장한 대중매체와 소셜 미디어는 말초적인 욕망을 쏟아내며 우리에게 말한다. 질문을 멈추라. 생각을 멈추라. 다만 소비하는 노동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라. 우리는 다시 혼돈 속에 던져졌다. p.175

<베다 - 우주와 자아>

누군가 신을 말할 때, 그 신은 발화자의 내면을 반영한다. 신은 각자의 마음 안에 산다. p.191
<우파니샤드>의 탐구 주제는 무엇인가?... 세계, 자아, 관계. 이것이 <우파니샤드>가 탐구하는 분야다. p.196
관념론에서는 자아가 고정되어 있다. 수정구슬은 나의 마음 혹은 의식으로, 유일한 실재다. 세계는 그 수정구슬 안에 왜곡되어 비치는 이미지다...내 앞의 세계는 그저 하나의 거대한 가상이다. 그래서 인도인은 이 세계를 환영이라는 의미의 '마야'라고 불렀다. p.207~208
종교와 사상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사라지거나 적응하거나. 오늘날 남은 대부분의 거대 종교와 사상은 후자를 선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오늘날 많은 이가 따르는 거대 규모의 종교나 사상 체계가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이라는 것일 뿐,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p.217~218
세속과 탈속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이 너에게 쥐여준 의무를 행하라. 그리고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그럴 때 행위는 업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너를 신에게 향하는 길로 인도할 것이다. 여기에 <바가바드 기타>의 보편적 가치가 있다. p.231
윤회와 업의 실제 의미는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사회 제도 안에서 착한 행동, 나쁜 행동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우주의 질서 안에서의 행위와 거스름이 삶과 죽음의 형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 차이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전자는 타인의 시선이 내 행위의 평가 기준이 되는 반면 후자는 자기의 내면 안에서 우주적 질서와 자연스러움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p.248

<도가 - 도리와 덕성>

<불교 - 자아의 실체>

유애는 존재에 대한 욕구로서, 죽음과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집착이다. 무유애는 존재하지 않음을 추구하는 욕구로서, 허무주의적 태도로 삶을 포기하고자 하는 집착이다. 불교는 세상을 허상으로 보고 세상에 안주하려는 태도를 경계하지만, 그것이 허무나 도피를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다. p.336
불교에서는 고정 불변하는 나, 작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를 무아라고 한다... <베다>의 세계관에서는 나의 궁극적 본질로서 아트만을 상정한다. 아트만은 영원하고 불변하며 고정된 완벽한 실체다. 이 경우 개인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표는 이러한 실체에 도달하는 것이 된다. 반면 불교에서는...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흩어지고 모이는 임시 상태일 뿐이다. p.337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인 니르바나(Nirvana)를 음역한 것이다. 니르바나의 본래 뜻은 '불어서 꺼진 상태'를 말한다. 고통과 집착의 불꽃이 소멸하고 깊은 고요와 적막 상태에 도달하는 것. 완전한 마음의 평화. 이것이 최종 목표다. p.340
무는 말 그대로 없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공은 단순히 없는 것이 아니라 작용은 있으나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p.371
우리가 경험하고 행한 모든 것은 아뢰야식에 씨앗처럼 가능성의 상태로 남게 된다... 이러한 설명은 윤회에서의 업(카르마)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당신의 마음이 지옥이라면 이것은 흔적으로 남아 당신의 다음 삶을 결정할 것이고, 당신의 마음이 천국이라면 당신의 다음 삶도 그렇게 결정될 것이다... 내가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것을 심판하는 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나의 마음 이어서다. p.378
어떤 이들은 심지어 자신에게는 세계관 같은 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하나의 세계관의 대륙에 발을 딛고 산다. 우리가 자신의 세계관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것은 나의 세계관이 내가 일어설 수 있는 단단한 대지를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나의 한계이자 울타리가 되기 때문이다. p.385

<철학 - 분열된 세계>

칸트는 결혼하지 않았다. 다만 많은 이와 교류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연구에 몰두한 삶을 살았다... 81세인 1804년 2월 12일, 병석에 누운 그는 평생을 함께 해온 늙은 하인 람페에게 포도주 한 잔을 청했다. 그리고 잔을 비운 다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좋다(Es ist gut)." p. 451
회의주의는 선택하기 쉽기 떄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민 없이 선택하는, 가장 무성의한 대답이기도 하다. 서양 철학이 오늘날까지도 학문의 기초가 되고 높게 평가되는 것은 무수히 많았던 회의주의적 대답 속에서 어렵게 진리의 토대를 쌓아온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p.456
지금 당신 눈앞에 펼쳐진 외부 세계는 당신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이미 당신의 인식 과정을 통해 내면에 그려진 현상 세계다. 칸트의 철학은 그래서 '관념론'이 된다. p.461
우리는 인식된 대상이 아니라 인식하는 주체의 한계와 능력을 검토해야 한다. 그는 진리의 기준을 '외부의 대상 세계'에서 '내면의 주관 형식'으로 뒤집어 놓았다. p.462
현상 너머의 세계(물자체)는 우리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세계지만, 적오도 그곳에는 빛깔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촉각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단단한 형태와 구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소량의 물질과 에너지가 요동치는, 거의 비어 있는 세계라고 생각해야만 한다. p.469

<기독교 - 교리와 신비>

예수의 가르침은 단순히 착하게 살면 사후에 복을 받는다는 기복적인 믿음이 아니라 나의 삶과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실천적이고 혁명적인 측면이 있다. p.509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과 당시 유대 민중의 관점이다. 로마 제국의 지배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속에서 일상의 고단함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삼십 대의 젊은 에수는 어떤 인물로 비쳤을까? p.513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지위에 대한 해석이 예수 스스로나 혹은 그의 생전 제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바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p.516
전지전능하고 완전무결한 신의 개념을 불완전한 인간으로부터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 둘을 엄격히 분리하는 것이었다. 기독교는 2천 년 가까이 이원론적 세계관을 지켰다. p.534
그(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마음에 신이 내재하고 있음을 가르쳤다. 또한 문자로서의 교리보다 신실한 체험을 강조했다. 깊은 침묵 속에서 내면의 심연으로 내려갈 때, 우리는 신의 실재를 체험할 수 있다. 그가 이렇게 설교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가 자신의 내면 안에서 광활한 세계를 보았고, 인간의 영혼과 신의 궁극적 합일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p.537
그(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영혼 혹은 마음의 깊은 곳에 '영혼의 불꽃'이 있음을 말한다. 내면으로의 깊은 침잠과 탐색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이 빛은 신 자체의 힘이고, 신이 인간 속에서 작용하는 그 무엇이다... "많은 단순한 이가 신은 저기에 있고 자신들은 여기에 있는 것처럼 신을 보아야 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신과 나, 우리는 하나다. 인식을 통해 나는 신을 내 속으로 들어오게 하고, 사랑을 통해 나는 신 안으로 들어선다." p.540
진정한 자유. 이 말은 세속의 화려함과 분주함에 마음을 빼앗긴 우리에겐 너무나도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우리 일생 전체가 자본주의적 노동과 소비만으로 채워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때가 되고 우리가 준비되었을 때, 우리는 각자의 심연으로 침잠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p.541

<에필로그>

현대인은 외국을 여행하며 이것저것 경험해보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이면서도, 자기 내면의 가려진 영역으로 나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p548
많은 사람이 '세계관'이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는 세계관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슬픈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수감자라는 것을 모르는 수감자와도 같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세계관은 감옥이다. 감옥 안에 있는 자에게는 감옥 밖의 한 줌의 공간도 허락되지 않는다. 세계관도 마찬가지다. 세계관은 당신 내면의 감옥이다. p.548
우주의 창조와 소멸을 말하고 물질의 탄생과 생명의 의미와 모든 존재하는 것의 가치를 논하는 자. 이렇게 놀라운 초월적 존재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당신이다. 당신이 세상을 보는 유일한 자이고, 세상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최후의 존재다 p.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