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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맥서점/2020년대

하얼빈 - 김훈, 2022

  지난 11월 한국에 다녀오면서 사왔던 책. 돌아와서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손대지 못하고 있다가 내친 김에 훅 읽어버렸다. 김훈의 책은 기대에 대한 만족과 아쉬움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다. 만족은 그의 예리한 시선과 문체에서 오고 아쉬움은 글의 몰입감에서 오는데 몰입감은 주로 "칼의 노래"가 주었던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만들던 그런 힘에 대한 그리움에서 온다.

  읽은 지 여섯달이 넘게 지난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김훈이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집중했던 것, 방아쇠를 당김에 대한 묘사와 해석이다.  생각지 못했던 생생함은 늘 김훈의 글을 찾게 되는 이유인 것 같다. 이토 히로부미를 좀 더 알게 되었고, 김훈이 해석한 그 당시 한국의 정황과 천주교의 입장도 새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역시 남아 있다. 만월대에서의 순종과 이토의 사진도 찾아보았다. 무엇보다 김훈만의 독특한 문체를 만나는 건 늘 반가운 일이다. - 2023년 1월 즈음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안중근은 가랑잎 더미에 엎드려서 거총했다. 눈에서 가늠쇠를 지나 표적에 이르는 조준선이 총구 앞에 열렸고, 노루의 전신이 그 끝에 걸려있었다...

  안중근은 왼팔로 총신을 받치고 오른손 검지를 방아쇠울 안에 넣었다. 엎드린 자리가 편안했다. 안중근은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를 방아쇠에 걸었다. 안중근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반을 내쉰 다음 숨을 멈추었다 바위는 보이지 않고 노루만 보였다. 조준선 끝에서 총구는 노루의 몸통에 닿아 있었다.

  오른손 검지 둘째 마디는 안중근의 몸통에서 분리된 것처럼, 직후방으로 스스로 움직이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총의 반동이 오른쪽 어깨를 때렸다. 총의 반동에 어깨로 맞서지 않고, 몸안으로 받아들여서 삭여내야 한다는 것을 안중근은 소싯적부터 알고 있었다.

  조준선 끝에서 노루가 쓰러졌다....

  ......총이란, 선명하구나.

p22-23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가늠쇠 너머에 표적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표적으로 시력을 집중할수록 표적은 희미해졌다. 표적에 닿지 못하는 한줄기 시선이 가늠쇠 너머에서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보이는 조준선과 보이지 않는 표적 사이에서 총구는 늘 흔들렸고,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는 방아쇠를 거머쥐고 머뭇거렸다.

  방아쇠를 당기고 나면 실탄이 총구를 떠나는 순간 조준선은 지워졌고 총의 반동이 손바닥과 어깨에 걸렸다. 비틀린 조준을 다시 회복하고 나면 표적은 다시 안개 속에 묻혔다.

  방아쇠를 당길 때,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는 몸의 일부가 아니라 홀로 독립된 생명체였다. 둘째 마디는 언제 당겼는지도 알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스스로 직후방으로 작동해서 총알을 내보냈다. 그러므로 이토를 조준해서 쏠 때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절망감과 복받침, 그리고 표적 너머에서 어른거리는 전쟁과 침탈과 학살과 기만의 그림자까지도 끊어버리고 둘째 마디의 적막과 평온을 허용해야 할 것이었다. p.159

 

  이토는 조준선 위에 올라와 있었다.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가 방아쇠를 직후방으로 당겼다. 손가락은 저절로 움직였다.

  총의 반동을 손아귀로 제어하면서 다시 쏘고, 또 쏠 때, 안중근은 이토의 몸에 확실히 박히는 실탄의 추진력을 느꼈다. 가늠쇠 너머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이토의 모습이 꼼속처럼 보였다. 하얼빈역은 적막했다. p.166

 

  - 짐은 오랫동안 공의 경륜에 의지해왔다. 공의 노고가 컸다...

  공의 노고가 컸다.......라는 천황의 말은 어디를 겨누고 있는 것인가.

  - 반도에 보낸 병력이 충분한지, 짐은 그것을 걱정한다.

  메이지가 하려는 말은 이것이었구나......

  다 알면서도 말을 멀리 돌리고 있었구나...... p.15

 

  병력을 부딪치지 않고 도장을 받아내서 오백 년이 넘은 나라의 통치권을 인수한 이토의 역량을 메이지가 모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러시아를 도모할 때까지도 이토는 그것이 도장으로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나, 그후 조선 사대부들과 자주 상종할 수록 이토의 뜻은 도장 쪽으로 기울었다. 왕권의 지근거리에서 세습되는 복락을 누린 자들일수록 왕조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갈 때는 새롭게 다가오는 권력에 빌붙으려 한다는 사실을 이토는 점차 알게 되었다. 도장의 힘은 거기서 발생하고 있었다. p.17

 

  큰 구도가 필요하다. 폐허를 크게, 조선 황제를 작게 나타내라고 이토는 만월대 돌계단 앞에서 일본인 사진사에게 명령했다. p.51

 

  사내들은 한토막씩 말을 해서 이야기를 엮어나갔다. 이미 다 아는 일을 다시 말했고, 말할 때마다 처음 듣는 것처럼 귀를 기울였다. 먼 곳에서의 일이 집 마당에서 벌어진 일처럼 가깝게 들렸다. p.59

 

 집에 와 있을 때도 남편은 늘 나그네 같았다. 남편에게는 넘어서지 못할 낯섦이 있었다. 김아려는 남편 앞에서 수줍어했다. 그 사내는 땅에 결박되어 있으면서도 땅 위에 설자리가 없었다. 김아려는 남편의 운명을 감지하고 있었다. p.67

 

  그러니, 그렇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야 한다면 그 죽임의 목적은 살에 있지 않고, 이토의 작동을 멈추게 하려는 까닭을 말하려는 것에 있는데, 살하지 않고 말을 한다면 세상은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세상에 들리게 말을 하려면 살하고 나서 말하는 수밖에 없을 터인데, 말을 혼자서 주절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고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일진대, 그렇게 살하고 나서 말했다 해서 말하려는 바가 이토의 세상에 들릴 것인지는 알기가 어려웠다. p.89

 

  -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기회를 얻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정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p.238

 

  - 제가 이토의 목숨을 없앤 것은 죄을 수 있겠지만, 이토의 작용을 없앤 것은 죄가 아닐 것입니다. 재가 재판에서 이토를 죽인 까닭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복이고, 이토가 살아 있을 때 이토에게 말하지 못한 것은 저의 불운입니다, 신부님. p.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