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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맥서점/2020년대

[서점놀이] 오은영의 화해 - 오은영

2022.1.21 신논현역 지하 교보핫트랙스에서...

 

오은영의 "오은영의 화해"

 

최근에 오은영 박사와 한시간 상담을 받는데 수백만원이 든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마저 예약을 하기 위해서는 몇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어떤 부모는 그동안 수많은 심리상담을 받았지만 오은영 박사와 나눴던 한시간이 더 도움이 되었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 오은영 박사가 책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해졌다. 책을 집어들고 몇장 넘기다 이 문장에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을 부모로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처음든 생각은 반감이었다. 작가의 말을 돌려서 표현하면 이 세상에 최소한 몇명은 완벽한 부모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얘기 아닌가?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을 부모로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라거나 "이 세상에서 완벽한 부모가 있기는 할까요?"라고 말했다면 그렇게 반감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연 작가는 완벽한 부모를 정의내릴 수 있을까? 자녀와의 갈등으로 고통받는 부모들에게 "완벽"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내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저자는 철학자가 아니라 정신과 박사이다. 그녀의 단어 선택은 철학자나 과학자가 추구하는 '진리'가 아니라 상처의 '치유'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완벽한 부모'를 꿈꾸기 마련이다. '완벽한 부모'를 정의내릴 수는 없어도 부모라면 누구나 마음 속에 그리고 이를 추구할 것이다. 끝내 도착을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달려가는 종착지와 같은 것일 것이다.

 

그런 부모들에게 "이 세상에 완벽한 부모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라는 말과 "이 세상에 완벽한 부모를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라는 말 중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일까? 아주 작은 차이지만 앞의 글은 위로만을 준다면 저자의 글은 위로와 희망을 함께 주는 것이 아닐까?

 

물론 다음 문장에서 저자도 "인간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완벽한 부모도 불가능해요."라고 말을 이어가지만, 앞서의 문장 한줄이 여러 생각을 해보게 해 주었다. 저자가 던졌던 문장이 마음을 움직이는 언변가나, 의사에게 적절한 것이었다면, 내가 던졌던 문장들은 사색가들에게나 적합한 문장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