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 이야기/Talk

[펌] 바로크 음악을 대표하는 두 작곡가, 바흐와 헨델

오늘 서양음악사 두번째 시간으로 그레고리언 챈트와 바로크 음악의 특징 그리고  바흐에 대해서 배웠다.

아래글은 바흐와 헨델을 비교해서 잘 정리해 놓은 글이 있어서 가져왔다..(원문)

교수님은 '바흐'는 음악가로서 뿐만아니라 스무명이 넘는 자녀를 둔 검소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인 아버지로서도 훌륭했다는 점, 그리고 그 당시에는 그다지 인기가 높지는 않았고 후대에 재평가되었다고 이야기 해 주셨는데, 아래 글을 읽어보니 왜 그랬는지 한층 이해가 간다.

추가적으로 바로크 음악에 대한 설명도 스크랩...(원문)

--------------------------------------------------------------------------------------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면 대체로 극음악이 탄생한 1600년경부터 바흐가 죽은 1750년경을 말하는데 이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에 싹튼 인간중신적 세계관이 팽배해져서 점차 시민계급을 성장시켰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합리적인 관념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로크(Baroque)란 말은 "찌그러진 진주"라는 의미로서 이 시대의 음악은 안정감 대신 1) 약동감을 특징으로 하여 2) 웅장하고 3) 거대하면서도 거기에 4) 다채로운 장식이 함께 가해지는 것이다. 대체로 17세기 전반을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달한 단성음악 양식과 18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한 대위법적 다성음악 양식이 발달한 시대이다.
바로크 음악의 시작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활동한 카메라타(Camerata)라는 문예인들의 새로운 음악 관념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대위법적 음악이 가사의 내용을 전달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가벼운 기악반주 위에서 가사가 명료하게 전달되는 새로운 음악 형태를 탄생시켰는데 이것이 단성음악(Monody)이다. 이것을 적용하여 카메라타 일원인 갈릴레이(V. Galilei, 1520∼1591)와 카치니(G. Caccini) 1545∼1618)는 최초로 반주가 딸린 서정가곡을 만들었다. 단성음악의 선율반주는 저음 현악기로 연주되는데 이것은 작품전체를 통하여 계속되기 때문에 통주저음(Basso Continuo)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통주저음은 저음부 아래에 화음을 지시하는 숫자를 붙였기 때문에 숫자저음(Figured Bass)이라고도 부른다.


추가) 다채로운 장식(Ornament)은 Thrill이나 Turn(?)이 있는데, 그당시 현악기에 비해 Sustain이 부족했던 cembalo 등의 악기의 마디와 마디를 채워주는 역활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

바로크 음악을 대표하는 두 작곡가, 바흐와 헨델


1600년 경부터 1750년에 이르는 바로크시대로 분류된다.
이 시대는 바로 바흐와 헨델이 오라토리오·칸타타·협주곡 등에서
불멸의 작품을 남긴 절대 군주의 시대로 변화와 모험,
이성이나 신앙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시기였다.

 

 

 

바흐(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1685년 독일에서 태어난 독일의 대 작곡가 '음악의 아버지'이다.
'모든 음악은 바흐에게서 나온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흐가 그시대 음악의 기초를 확고히 다져놓았음을 다시 한번 알려준다.
그는 48곡의 전주곡과 푸가를 작곡하여 대위법 음악을 정점에까지 끌어 올였으며
근대 서양 음악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가 지은 오르간 음악과 종교 음악은 특히 훌륭하다고 평가받는데,
'마태 수난곡'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무반주 첼로 협주곡집' 등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헨델(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은 바흐와 쌍벽을 이루는 작곡가로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우며,
그 역시 독일에서 태어나 나이도 바흐와 같다.
하지만 후에 영국으로 귀화해 생애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냈다.
그의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오라토리오 '메시아'. 관현악곡 '수상음악' '왕궁의 불꽃놀이'등이 있으며
그의 음악은 바흐의 음악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바로크 시대의 많은 작곡가들 중에서 바흐와 헨델은 가장 뛰어난 음악가로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그토록 빠른 속도로 쓰여진,
그토록 많은  그들의 작품들이,
그토록  빼어나서,
2백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청중에게도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흐와 헨델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태어났습니다.
둘 다 1685년생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살아간 길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바흐는 독일에서 태어나 평생 독일 땅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는데
헨델은 역시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광범위하게 여행하고
결국은 영국으로 귀화해 영국에서 죽은 국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시골뜨기였고,
한 사람은 국제신사였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그들의 음악도 그들의 사람됨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바흐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모든 종류의 음악을 다 썼는데,
오직 오페라만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골사람이었으니까요.

이에 비해  헨델은 바로 그  오페라를 가지고 국제적인 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바흐가 항상 작은 악단, 작은 합창단을  위해 작품을 썼던데 비해,
헨델은 대도시의 큰 악단, 큰 합창단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이밖에도 두 사람의 대조되는 모습을 찾아보면 더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 다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들이었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오늘날의 청중은 바로크,고전,낭만,현대음악을 다 접하고 있는데,
두 사람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두 사람의 음악이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한 시대를 같이 살았다는 것은 이렇게 극단적인 차이까지도 덮어주는 효과가 있음을 봅니다.

 

작곡을 공부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겠지만,
언제나 중요한 것은 다른 작곡가들이 무엇을 해왔고
지금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아는 일입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다른 사람의 음악을 레코드로 듣기도 하고, 
출판된 악보를 사서 보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없던 시대에는 어떻게 했을까요?

바흐는 유명한 오르가니스트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 수백 킬로미터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헨델은 그 일을 위해 이탈리아까지 여행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출판된 악보가 귀하던 시절
그들이 다른 사람의 음악을 접하는 또 다른 길은 악보를 베끼는 일이었습니다.
바흐는 거의  평생을 남의 악보를 베끼면서 배우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헨델도 같은 방법으로 음악을  배웠지만,
바흐처럼 집요하게 계속하지는 않았지요.
바흐가 베낀 악보들은 대개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탈리아가 음악의 선진국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비발디의 음악을 많이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이탈리아적인 활발함, 화려함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독일적인 강건함, 신중함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흐가 이탈리아와 독일적인 것만 공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음악을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평생동안 정말 우수하고 부지런한 학생이었던 것입니다.

우수한 학생은 어떻습니까?
남에게서 배울 것은 모두 배우되,
그 배운 것을 자기식으로 해석해서 소화해내는 사람이 아닙니까?
바흐는 자기식의 표현과 기법을 개발해내는 데도 늘 부지런했습니다.
그래서 바흐의 음악은 당시의 모든 국제적인 흐름들을 다 흡수해서 하나로 만든,
큰 강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의 음악은 종류도 많습니다.
기악 분야를 보면 서곡과 푸가들, 
각종 소나타, 토카타, 평균율 클라이버, 조곡, 변주곡, 협주곡들이 있고,
성악 분야로는 우선 2백곡이 넘는 칸타타들,
모테트, 마태와 요한 수난곡, b단조 미사 등이 있습니다.
그 어느 분야에서도 바흐는 그때까지 그 누구도 생각치 못했던 깊이 있는 작품을 썼습니다.

'깊이 있는  작품',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음악을 들으면 우리는 어떤 자극을 받습니다.
어떤 가락을 콧노래로 따라 부른다거나,
발로 장단을 맞추는 것은 벌써 그 음악에서 자극을 받았다는 표시입니다.
음악에서 받는 자극은 여러가지 양상을 띱니다.
어떤 때는 큰 소리로 따라 부르고 싶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같이 뛰며 춤을 추게도 됩니다.
어떤 때는 알게 모르게 슬픈 기분을 즐거운 기분으로 바꾸어 놓기도 하고,
반대로 더욱 슬픈 기분으로 몰아 넣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게도 합니다.


같은 음악을 듣더라도 그 반응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음악을 듣느냐에 따라서요.
20세기 한국사람이 듣느냐,
20세기 독일 사람이 듣느냐,
바로크 시대의 음악양식에 익숙한 사람이 듣느냐,
바흐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이 듣느냐에 따라 그  음악의 효과는 차이가 납니다.

바흐는 독일의 종교개혁이 만든 경건한 사회 분위기에서 자라나고 활동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아무리 여러나라의 음악을 섭취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독일의 기독교,
루터파 교회의 분위기 속으로 흡수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혼이 울릴 수 있는 사람은
18세기 초의 서양음악에 가장 익숙한 독일의 기독교인들일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바흐 음악의 '깊이'는 '18세기 독일의 기독교인'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느끼는 정도가 약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20세기 한국의 비기독교인,
더구나 서양음악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바흐의음악은 거의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혼 깊은 곳을 울려줄 수 있는 음악을 가진 사람들, 또는 그런 민족이 있다.
그러나 그런 음악의  깊이를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바흐의 음악을 열심히  듣고,
그정신 세계를 이해하려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혼의 울림'에 어느 정도 가까이 갈수 있다.
그러므로 그 '깊이 있는 음악'은 노력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이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는 바흐의 어느 작품에 못지 않게 깊이 있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바흐의 어느 작품보다도 <메시아>를 통해서 혼의 울림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는 더 넓습니다. 
바흐의 음악을 듣고 조는 사람들도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면 정신이 납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내용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이라면
서양 음악의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조차도 감동을 느낍니다.

혼의 울림까지경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건 왜 그런 것일까요?

헨델의 음악이 보다 직접적인 호소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음악이 갖는 보다 폭넓은 효과는 헨델이 살아온 내력,
그가 이 작품을 쓰게된 동기를 알지 않으면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헨델은 독일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오페라에 심취하여 처음에는 독일에서,
다음에는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제작에 관한 온갖 기술을 연마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영국에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영국은 새로 크게 일어나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특히 새로운 시민 계급이 건강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헨델은 이런 영국의 중심지 런던에 이탈리아식 오페라를 제공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이탈리아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가수들을 불러다가 이탈리아어로 공연하는 오페라였습니다.
물론 당시의 이탈리아 오페라는 국제적으로 가장 화려한 공연물이었고,
여러나라의 궁정에서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공연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국제적인 추세에 발맞추는 의미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영국에도 귀족들이 있었고, 돈많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런던 같이 국제적인 도시에 국제적인 예술이 빈약하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헨델은 그런 영국의 '후진성'을 보고 한심스럽게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어쨋든 헨델은 약 30년에 걸쳐 수많은 이탈리아식 오페라를 써서 런던에서 공연을 시켰습니다. 
물론 귀족과 부호들의 후원을 받았고,
그들에게서 그의 작품들은 대단한 환영을 받았지만,
런던의 일반 시민들은 냉담했습니다.
그러나 헨델은 굽히지 않고 이탈리아식 오페라단을 이끌어나갔습니다.

하지만 파산의 위기를 겪기까지 하면서 투쟁하다시피 계속된 그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도 극장을 좋아하는 영국사람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심지어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조롱하는 작품인 '거지 오페라'가
공전의 성공을 거두면서 헨델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헨델은 좌절했습니다.
그에게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건강한 시민계급의 성장은 음악의 세계에서도 합창운동으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전문적인 음악가가 아닌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음악의 경험을 나누어 가지는
합창이야말로 건강한 시민 생활에 큰 즐거움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활동을 통해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같이 음악 만드는 것이 좋아서 벌이는 활동일 뿐이었습니다.

헨델은 이들에게 맞는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뜻도 모를 이탈이아어가 아닌 그들의 말,
영어로 된 '오라토리오'였습니다.
그것은 뜻밖의 호응을 얻었고,
좌절했던 헨델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좋은 작품이 여럿 나왔고,
그 중 가장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 <메시아>였습니다.
<메시아>를 쓸때  헨델은 눈물을 흘리면서 썼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평생동안 그 탁월한 재능을 낭비해온 것에 대한 회개의 심정이
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고 하면 지나친 속단일까요?
 <메시아>는 이렇듯이 국제적인 대도시의 건강한 시민들이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목소리로
간절한 심정을 담아 부를 수 있는 음악으로 작곡되었기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 한정되지 않는 혼의 울림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닐까요?

그러나 헨델의 오페라들은 헨델의 재능의 낭비만은 아니었습니다.
헨델은 오페라에 나오는 수많은 영웅 호걸들이
극한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의 심정을 정확히 포착,
그 성격과 상황에 너무도 정확히  맞는 음악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헨델의 오페라들은 이제는 더 이상 상연되지 않지만,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래들을 수없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유명한 <라르고>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전혀 개성이 다른 두 위대한 작곡가 바흐와 헨델이 활동했던 시기는
사실상 바로크 시대의 말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때까지의 바로크가 창조해 낸 온갖 정신과 기법을 하나로 묶어
바로크 음악의 최고의 결실을 맺어 주었습니다.

그들이 한창 활동하고 있을 동안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작고 소박하고 절제된 음악이었는데,
이런 음악이 다음 시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민사회에 더 어울리는,
시민사회를 위한 음악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게오르그 프레드리히 헨델 George Frideric Handel(1685∼1759)ː영국 작곡가. 독일 할레 출생.

할레 출생. 9세 때부터 오르간 연주자인 F.차하우에게 사사하여 작곡의 기초와 오르간을 공부하였다. 그 후 아버지의 희망에따라 한때 할레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18세 때 함부르크의 오페라극장에 일자리를 얻어 이때부터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20세 때 오페라 《알미라 Almira》(1705)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 오페라의 고향인 이탈리아로 가 로마에서A.코렐리, A.스카를라티의 영향하에 실내악을 작곡하는 한편 피렌체 ·베네치아에서 오페라 작곡가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1710년하노버궁정의 악장(樂長)으로 초빙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방문한 런던에 매료되어 1712년 이후는 런던을 중심으로 이탈리아오페라의작곡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1712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오페라 《충직한 양치기 Il pastor fido》《테세오 Teseo》를 작곡, 상연하고1718∼1720년에는 찬도스 공작의 후원 아래 종교음악의 명작 《찬도스 앤섬 Chandos Anthoms》 11곡을작곡하였다. 또 1719년에는 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상연을 위해 ‘왕립 음악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다른 두 이탈리아인 작곡가G.B.보논치니, A.아리오스티와 함께 그 지배인이 되었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창작력의 전성기에 들어선 그는 오늘날까지도상연되고 있는 이탈리아오페라의 명작 《라다미스토 Radamisto》《오토네 Ottone》《줄리어스 시저 GiulioCesar》《타메를라노 Tamerlano》《로델린다 Rodelinda》《아드메토 Admeto》《톨로메오 Tolomeo》 등을작곡하였다. 또 1721년에는 초기의 명작 오라토리오 《에스테르 Esther》를 작곡하였으나 1728년부터 약 10년간은이탈리아오페라 작곡가로서의 헨델의 운세가 점차 기울어갔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던 영국의 시민계급이 궁정적 ·귀족적인취미를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오페라에 대해 반발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728년 대사(臺辭)에다 민요선율을 곁들여당시의 귀족사회를 통렬히 풍자한 J.C.페푸시 작곡의 《거지 오페라 The Begger’s Opera》가 상연되어 획기적인성공을 거두자 왕실 음악아카데미는 부득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헨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에 아카데미를 재건, 헤이마게트극장을 근거로 한때 옛날의 인기를 되찾았으나 1733년경쟁상대인 보논치니의 이탈리아오페라와 《거지 오페라》의 협공을 받고 두 번째 극장을 폐쇄하게 되었으며, 1734년 세 번째로이탈리아오페라의 기치를 들고 코벤트 가든 오페라극장 경영에 나섰으나 3년 후인 1737년 마침내 건강악화와 경제파탄으로 오페라작곡가 겸 극장 경영자로서의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헨델은 1732년경부터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예찬되고 있는 《메시아 Messiah》 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는 17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사순절(四旬節)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명성을 높였다. 또 17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 Alexander’s Feast》을작곡하고 1738∼1751년까지도 거의 모두를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경주하였다.

1739년 구약성서에 입각한 위대한 서사시적인 드라마 《사울 Saul》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Israel inEgypt》을 발표하면서 다시 건강을 회복한 그는 왕성한 창작력으로 1741년에는 고금의 명작 오라토리오 《메시아》를작곡하였다. 《메시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정수(精髓)를 순수하고도 감동 깊게 전해 주는 명작이다. 그러나헨델의 수많은 오라토리오 중에서 주로 서정적 요소를 강조하며, 접속하는 칸타타형태를 취한 이 작품은 오히려 예외적인 작품에속한다. 그의 오라토리오의 본질은 현실무대의 제약을 벗어난 가상적 무대에서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모체로 하는 보편적 ·윤리적인관념을 전개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는 종교적 감동을 주는 서정적 표현에 뛰어났고, 오페라작품 속에 축적한 선명한 이미지를환기시켜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구사하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이런 점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이 앞서 언급한 《이집트의 이스라엘인》과함께 1746년의 작품 《마카베의 유다 Juda Macabaeus》 등이다.

《메시아》 이후에도 그는 《삼손 Samson》《벨샤자르 Belshazzar》 등 뛰어난 오라토리오를 많이 작곡하였으며,1751년 오라토리오 《입다 Jephtha》를 작곡하던 중 시력을 잃었다. 그러나 실명한 후에도 오라토리오의 상연을 지휘하는한편 조수의 도움으로 구작(舊作)의 개정에 힘썼다. 헨델은 오페라(46곡), 오라토리오(32곡) 등 주로 대규모의 극음악 작곡에주력하였지만 기악방면에서도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유명한 관현악곡모음곡 《수상의 음악 Water Music》《왕궁의불꽃놀이 음악 Royal Fireworks Music》 외에, 작품 6의 합주협주곡, 작품 4 ·7의 오르간협주곡, 작품 2·5의 트리오소나타, 작품 3의 오보에협주곡, 그리고 1720년에 출판된 하프시코드용의 모음곡 등은 모두 주목할 만한작품들이다. 종교곡으로는 앞서 말한 11곡의 《찬도스 앤섬》 외에도 유명한 작품으로 위트레히트와 데팅겐의 전승(戰勝)을 축하한《테 데움 Te Deum》 등이 있다. 1726년에 영국에 귀화하였고 사후 최고의 영예인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 매장되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1685-1750)ː독일 아이제나흐 출생

생애】 요한 제바스티안은 중부 독일에 있는 루터파신앙의 중심지인 아이제나흐에서 거리의 악사인 요한 암브로지우스의 8번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당숙 요한 크리스토프의 오르간 연주를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10세 때 양친을 여의고,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집에서 살면서 독일 오르간음악의 전통을 익히게 되었다.
큰형의 가족수가 늘어나자 자립을 해야 했던 바흐는 1700년 봄 북독일의 뤼네부르크로 가서 그 곳 고등학교 급비학생이 되어 루터파의 교육을 받으면서 교회의 합창단원으로서 북 독일악파의 다양한 종교음악과 친숙하게 되었다.

170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듬해 바이마르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근무하면서 연주경험을 쌓았고, 3개월 후에는아른슈타트의 교회 오르간 주자로 채용되었다. 오르간 주자는 오랫동안 희망하였던 자리였으므로 성능이 좋은 오르간이 설치된 새직장에서 그는 열심히 오르간 연주법과 작곡법을 공부하였다. 그는 성가대를 훈련시키는 한편, 과거와 당시의 대가들의 작품을 필사·연구하여 점차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해 나갔다. 유명한 라단조의 《토카타와 푸가》, 그리고 《여행을 떠나는 사랑하는 형에게붙이는 카프리치오》 등이 이 시기에 쓴 작품들이다.

1707년 6월 바흐는 아른슈타트에서 같은 중부독일의 뮐하우젠으로 옮겨, 성브라지우스교 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여기서도 그는 전과 같이 열심히 작곡하면서 교회칸타타에도 손을 댔으며,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해 가을에 그는 사촌인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그 후 13년 동안에 7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그 중 빌헬름 프리데만과 카를필립 에마누엘은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하였다.
결혼한 이듬해 바흐는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가, 궁정예배당의 오르간 주자가되었다. 약 10년간의 바이마르시절에 그는 오르간 주자로서 명성이 높아지고 작품도 점차 원숙해져 대가로서의 풍모를 보이기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전주곡과 푸가》《토카타》 그리고 《코랄전주곡》과 같은 오르간작품이었으며, 따라서 이시기를 ‘오르간곡의 시대’라고도 부른다.

한편 그는 교회칸타타를 거의 매달 한 곡씩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궁정악단의 연주를 통해 비발디를 중심으로 하는이탈리아악파의 음악을 알게 되었다. 바흐는 이탈리아의 협주양식이라는 새로운 작곡법에도 착안, 비발디의 협주곡을 오르간이나쳄발로로 편곡하였다. 이것이 훗날 협주곡의 명작을 낳는 기초가 되었다. 17년 말, 그때까지 궁정의 집안싸움에 휘말리기도 하고,또 희망하고 있던 궁정악장의 지위도 얻지 못하자, 바이마르궁정악단에 실증을 느끼게 된 바흐는 괴텐으로 이사하였다. 괴텐궁정악단의지위는 새바람을 찾고 있던 바흐에게 가장 조건이 좋은 것이었으며, 그는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17인으로 구성된 궁정 악단을이끌어 가면서 자유롭게 작곡과 연주에 열중하였다.
좋은 환경과 풍족한 생활 속에서 창작에 대한 의욕이 높아진 그는 잇달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

기악곡, 3개의 《바이올린협주곡》, 6곡의 《브란덴부르크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의 소 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를위한 모음곡 등은 이 시기에 작곡된 것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밝은 빛으로 충만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흐의 사회적 ·가정적인행복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20년에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죽자, 이듬해 35세의 바흐는 안나 막달레나를 새로 아내로맞이하였다. 그리고 그녀를 위하여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곡집》 (《프랑스모음곡》도 포함)을, 그리고 장남 프리데만을 위하여《인벤션》을 작곡하였으며, 《평균율 클라비어곡집》도 이 시기에 정리된 것이다.

1723년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교회의 칸토르에 취임하여 죽을 때까지 27년간을 교 회음악가로 보내게 된다. 그의임무는 기악과 성악의 개인지도와 합창단의 훈련, 그리고 이 도시의 교회음악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성토마스교회와성니콜라이교회에서는 일요일마다 칸타타가 연주되었고, 성금요일에는 수난곡이 불려졌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의 하나님은 견고한성이로다》 등을 포함한 140곡 이상의 교회칸타타, 《마태오수난곡》을 포함한 몇 곡의 수난곡, 《마니피카트》 《크리스마스오라토리오》 《나단조미사》 등 많은 교회음악이 작곡되었다.
이 라이프치히시기를 ‘교회음악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어느면에서는 옳지만, 사실상 그는 이 때 대학생의 연주단체를 위해 많은 세속적인 칸타타와 클라비어협주곡도 작곡하였고, 만년에는대위법작법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골트베르크변주곡》
《음악의 헌정》《푸가의 기법》 등도 작곡하였다. 그러나 이 최후의《푸가의 기법》은 급속히 쇠약해진 시력과 뇌졸중의 발작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결국 실명한 그는 7월 28일 오후, 복용해 온약의 해독으로 급격한 전신 허약증세를 일으켜 별세, 성 요한교회의 묘지에 묻혔다.

 

작풍

바흐는 대략 17세기 초엽에서 시작되는 바로크음악의 총괄자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독일의 전통적인 대위법 예술 속에서성장하였으며, 북독일의 북스테후데와 남독일의 파헬벨의 오르간음악의 작법을 습득하였다. 다음에 코렐리와 비발디로부터 이탈리아음악의명쾌한 협주양식과 풍부한 화성, 그리고 라틴적인 형식감을 도입하였으며, 륄리와 쿠프랭에게서 프랑스음악의 섬세한 건반작법과 대담한프랑스식 서곡을 배웠다.
이러한 당시의 온갖 음악의 전통과 각 국민의 양식이 바흐의 천재적인 개성 속에서 융화되어 긴장도가높은 독특한 음악을 낳게 한 것이다. 그러나 바흐를 전통적인 보수주의자, 여러 양식의 총괄자로서만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하겠다. 그의 작풍에는 베토벤이 낭만파를 예견하고, 바그너가 20세기의 음악을 예견한 것과 같이, 훗날 발생한 고전파의 양식을암시하는 많은 특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