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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맥서점/2020년대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2021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2021

한강 작가 작품과의 다섯 번째 만남. 그분의 글이 과연 대중적일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늘 가슴 깊이 다가와 위로를 준다. 몇 작품 읽다 보니 작가가 어떤 사물의 특징이나 과학적 지식을 문학적인 해석과 이야기로 연결 짓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강 작가의 MBTI는 INFP라고 한다. 내향적이고, 직관적이지만 감정적. 그녀의 작품 속에 그런 성격이 잘 녹아있는 것 같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오는데, '눈', '새', '심해잠수함', 심지어 '양자역학'과 '끈이론'까지, 이 모든 것들은 작품 속에서 문학적으로 재해석된다. 평소 어떤 정보를 접했을 때 자신의 문학적 세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분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사색이 이런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처음 책장을 펼칠 때 '소년이 온다'와 유사한 작품을 기대하던 나는 중반에 다다를 때까지 작품의 핵심이 되는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어서 놀랐다. 작가 스타일이 여러 이야기들를 조금씩 쌓고, 엮어 나아가서 결국 그것들이 절정을 만들어내게 만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절반이 넘어서도 해당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건 좀 당황스러웠다. 결국 책의 끝부분에 가서야 모든 의구심을 풀어주는 이야기들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끝에 가서야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두 친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 책의 내용을 정확하게 읽으려면 책 끝에 있는 작가의 말을 꼭 읽어야 할 것 같다.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p.329 작가의 말

 

'소년이 온다'와는 다른 소설이었다. '소년이 온다'가 인간과 영혼에 대한 이야기라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나 역시 느꼈고 작가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소설에서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다르기도 하고, 한편으론 같기도 하다. 작별할 수 없는 사랑. 그런 사랑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소년이 온다'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역사의식은 분명히 전해진다. 그분들의 상처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도. 하지만 남은 분들의 상처를 분노가 아닌 사랑으로 연결한 점이 가슴에 남는다.

 

'어둡고 슬픈 게 좋지 않아요?'

 

25살의 한강 작가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나는 이말이 좋았다. 슬픔 만이 가르쳐 줄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다시는 이런 상처받은 사랑 이야기가 만들어지지는 않기를....

 

 


 

인선이 정말로 진지하게 포기하려고 했다는 것을 그때 나는 알았다. 삼 분에 한 번씩 저 자리를 찔릴 때마다 그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의료진에게 물은 것이다. 지금 깨끗하게 포기하면 안 되겠느냐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의사가 환지통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지금은 물론 손가락을 지키는 편의 통증이 더 강하지만, 손가락을 포기할 경우 통증은 손쓸 수 없이 평생 계속될 거라고. p.42

 

특별한 미인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녀가 그랬다. 총기 있는 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성격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 왔다.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 때문일 거라고.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p.44

 

처음에는 새들이라고 생각했다. 흰 깃털을 가진 수만 마리 새들이 수평선에 바싹 붙어 날고 있다고.

하지만 새가 아니다. 먼 바다 위의 눈구름을 강풍이 잠시 흩어놓은 것이다. 그 사이로 떨어진 햇빛에 눈송이들이 빛나는 것이다. 해수면이 반사한 빛이 거기 곱절로 더해져, 흰 새들의 길고 찬란한 띠가 바다 위로 쓸려 다니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거다... p.59

 

강풍이 먼바다의 먹구름을 흩을 때마다 햇빛이 수평선으로 떨어진다. 수천수만의 새떼 같은 눈송이들이 신기루처럼 나타나 바다 위를 쓸려 다니다 빛과 함께 홀연히 사라진다. p.67

 

하지만 실톱을 깔고도 엄마는 자주 꿈을 꿨어. 숨을 죽여 몸서리를 치고, 이따금 들고양이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흐느껴 울었어. 그 모습, 그 소리가 나한텐 지옥이었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다신 안 돌아올 거라고 그때 스스로에게 맹세했어. 저 사람이 내 인생을 더 이상 어둡게 채색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구부정한

등과 끔찍하게 여린 목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고 비겁한 인간의 모습으로. p.78

 

내가,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헌디 너가 그날 밤 꿈에, 그추룩 얼굴에 눈이 히영하게 묻엉으네...... 내가 새벡에 눈을 뜨자마자 이 애기가 죽었구나, 생각을 했주. 허이고, 나는 너가 죽은 줄만 알아그네. p.86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구름과 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다면 눈송이의 크기도 무한해질 테미지만, 낙하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수많은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 때문에 눈송이는 가볍다. 그 공간으로 소리를 빨아들여 가두어서 실제로 주변을 고요하게 만든다. 가지들이 무한한 방향으로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어떤 색도 지니지 않고 희게 보인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엔 짙은 색 코트 소매를 허공에 내밀고 보풀에 맺힌 눈송이가 물방울이 될 때까지 들여다봤다.들여다봤다.... 눈이 지나간 뒤 한동안은 잠에서 깨며 감은 눈으로 생각했다. 밖에 눈이 오고 있을지도 몰라.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지루한 방학숙제를 하다 말고 방안에 눈이 내린다고 생각했다. 방금 거스러미를 뜯어낸 손 위로, 머리카락과 지우개 가루가 흩어져 있는 장판 바닥 위로. p.94

 

좋아. 내가 이야기해줄게.

카메라 렌즈를 꿰뚫고, 그 뒤에 서 있었을 인선의 눈까지 관통해 날아온 그 눈의 빛이 내 눈을 찔렀다. 오랜 시간 그 만남을 기다려온 사람의 대답이라고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그 짧은 승낙의 말에 그의 인생 전부가 들어 있다고. p.97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 p.112

 

귀를 기울이는 듯 꼼짝 않고 갓등 위에 앉은 아미의 얼굴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한쪽 눈은 벽에서 움직이는 인선과 아마의 그림자를, 다른쪽 눈은 유리창 밖 마당에서 저녁 빛을 받으며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 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 같은 걸까. p.114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p.134

 

...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거야?

아직 주전자의 부리에서 김이 솟지 않았다. 비등점을 넘어서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

완성되지 않은거야, 작별이?

흰 실타래 같은 증기가 주전자 부리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맞물렸던 뚜껑이 달그락거리며 반쯤 열렸다 닫히길 반복했다.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p.192

 

한 사람은 날마다 수십 차례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활주로 아래서 흔들리며, 다른 한 사람은 이 외딴집에서 솜요 아래 실톱을 깔고 보낸 육십 년에 대해서. p.213

 

언제 돌이 됐을까요?

대답 대신 나는 물었다.

뒤돌아보자마자 그렇게 됐을까? 아니면 시간이 좀 걸렸을까?

... 두 발이 돌이 되어 놀라는 여자의 모습이 그 순간 눈앞에 떠올랐다. 그때라도 다시 몸을 돌리고 산을 오르면 되었다. 그때라도 다시 몸을 돌리고 산을 오르면 되었다, 아직 발이 굳었을 뿐이니까. 돌이 된 발을 끌고 몇 걸음 더 오르던 여자가 그러나 다시 돌아본다, 이번엔 종아리까지 돌이 된다. 무거운 두 다리를 끌며 여자가 더 비탈을 오른다. 고개를 넘어가면 살아남을 수 있다, 거기서 돌아보지만 않으면, 하지만 기어이 얼굴을 돌린다... 무엇을 보았기에? 무엇이 거기 있기에 계속 돌아보았나.

돌이 됐다고 했지 죽은 건 아니잖아?...

그때 안 죽었는지도 모르잖아요. 저건 그러니까....... 돌로 된 허물 같은 거죠.

그녀의 눈에서 장난기가 반짝였다.

아, 말하고 보니까 정말 그런 것 같은데.

농담이 아니라는 듯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인선이 갑자기 말을 놓았다.

허물을 벗어놓고, 여자는 간 거야!

아이처럼 만세 부르듯 두 손을 치켜든 인선을 향해 나도 웃으며 말을 놓았다.

어디로?

그건 뭐 그 사람 맘이지. 산을 넘어가서 새 삶을 살았거나, 거꾸로 물속으로 뛰어들었거나......

물속으로?

응. 잠수하는 거지.

왜?

건지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돌아본 거 아니야? p.242

 

엄마를 잘 몰랐어......

지나치게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p.255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p.311

 

엄마의 정신이 극도로 맑아지는 순간들이 섬광처럼 찾아왔어. 예리하게 벼린 칼 같은 기억들이 엄마를 습격하는 때가. 그럴 때면 엄마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어. 메스에 몸 가운데가 벌어진 사람처럼. 피투성이 기억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p.313

 

정말 누가 여기 함께 있나,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는, 관측하려 하는 찰나 한 곳에 고정되는 빛처럼.

그게 너일까, 다음 순간 생각했어. 네가 지금 진동하는 실 끝에 이어져 있나. 어두운 어항 속을 들여다보듯, 되살아나려 하는 너의 병상에서. p.322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라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p.329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