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깜짝 선물처럼 찾아온 연말 한국으로의 '휴가'에서 아내가 읽고 있던 책을 무심코 집어들었다가 결국, 아내에게 새책을 주문하게 하고 미국으로 가져오게 된 책이다. 2025년 대형 한국 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었다고 해서 최근에 쓰여진 책인줄 알았는데 1965년된 소설이 역주행을 한 케이스였다. 이 책은 출간 당시에는 큰 호응을 받지 못했는데, 50년동안 잊혀져 있다가 뉴욕에서 재출간 되었고, 번역본이 프랑스에서 입소문을 타고 유럽 전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2015과 2025년에 두번 바이럴을 타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아내 역시 재미있게 읽었는데, 막상 리뷰를 보니 부정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놀랐다고 한다. 찾아보니 너무 우울하고, 별 것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등이었다. 나 역시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니 그런 리뷰들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이 소설은 본인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작가는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일고 '너무 슬프다', '우울하다'고 말하는 것을 경계했다. 오히려 매우 즐거운 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작가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이 소설과 작가의 인생관을 말해준다. 존 윌리암스는 '스토너는 불쌍하고 실패한 인생 아닌가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천만에요.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평생 그 일을 했습니다. 그는 아주 운이 좋고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스토너는 자신이 원했던 삶(학문과 사랑)을 살기 위해 치열하게 버텼습니다. 그는 비록 세상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을지 모르나, 자신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켜냈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성공한 인간입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 내가 가졌던 생각도 작가의 생각과 거의 일치했다. 이 소설은 멋진 인생이 아니라 그냥 인생을 보여준다. 아마도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넌 무엇을 기대했나?"에 소설 '크눌프'처럼 작가가 (신으로) 개입해서 대답을 해주었다면 좀 더 명쾌했을까?
한편 읽어나가면서 이 소설이 3인칭을 사용함에도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닌 스토너의 관점의 일인칭 시점처럼 느껴졌다. 여러 등장 인물들을 조망하는 작가의 시점이라기보다 스토너의 시점에서 해석된 인물들처럼 보였다. 모든 전지적 작가 시점 작품들이 작가의 관점에서 해석된 인물 묘사가 될 수 밖에 없겠지만, 이 작품이 유독 그렇게 느껴진 것은 아마도 작가에게 스토너는 자신의 페르소나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더 좋은 소설이 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들 또한 주인공과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글맛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 글을 쓰고 다시 읽는 순간에도 약간의 전율이 느껴진다. 소설에 담긴 평범한 삶의 깊이와 그걸 오롯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한동안 나에게 여운을 남길 것 같다.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세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p.21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허파에서 숨이 빠져나갈 때마다 옷이 움직이는 것을 세심하게 인식했다. 그는 슬론에게서 시선을 떼어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책상을 꽉 붙들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 갈색 피부에 감탄하고, 뭉툭한 손 끝에 꼬 맞게 손톱을 만들어준 그 복잡한 메커니즘에 감탄했다. 작고 작은 정맥과 동맥 속에서 섬세하게 박동하며 손끝에서 온몸으로 불안하게 흐르는 피가 느껴지는 듯했다. p.22
그에게 장래는 곧 웅장한 대학 도서관이었다. 언젠가 도서관에 새로운 건물들이 증축될 수도 있고, 새로운 책들이 들어올 수도 있고, 낡은 책들이 치워질 수도 있겠지만, 도서관의 진정한 본질은 근본적으로 불변이었다. 그는 몸을 바치기로 했지만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곳에서 자신의 장래를 보았다. 장래에 자신이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장래 그 자차게 변화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변화의 도구라고 보았다. p.39
나도 자네들과 같지. 아니, 사실 더심해. 너무 똑똑해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거든. 게다가 그 사실을 잠자코 숨기지도 않을 테고. 이건 불치병일세. 그러니 무책임한 짓을 해도 안전한 곳. 내가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는 곳에 날 가둬두어야 해... 그러니까 신의 섭리인지 사회인지 운명인지, 하여튼 그것이 우리를 위해 이 누옥을 지어준 거야. 우리가 폭풍을 피할 수 있게. 대학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걸세.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p.47
파티는 여느 파티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중구난방으로 시작된 대화는 금방 미약한 힘을 얻어 별로 상관이 없는 다른 주제로 옮겨갔다. 웃음소리는 신경질적으로 짧게 끊어졌다. 계속 이어지지만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제사격이 거실 전체를 뒤덮은 가운데 작은 폭탄들이 터지는 소리 같았다. 참석자들은 조용히 전략적인 위치를 차지하려는 듯이 무심하게 이곳저곳으로 흐르듯이 움직였다. p.138
이렇게 꾸민 끝에 서재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비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지 하나가 묻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p.142
...그는 강의 내용에 완전히 몰입한 나머지 자신의 무능력은 물론 자기 자신과 눈앞의 학생들까지 잊어버리는 경험을 종종 했다...처음에는 이런 감정의 폭발이 신경에 거슬렸다. 자신이 영문학이라는 주제를 너무 친숙하게 대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사과를 했다....그는 기운을 얻어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일을 해 보기로 했다. 문학, 언어, 정밀하고 기묘하며 뜻밖의 조합을 이룬 글 속에서 그 무엇보다 검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글자를 통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과 정신의 신비, 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그는 마치 위험하고 부정한 것을 숨기듯 숨겨왔지만, 이제는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대담하게, 종내는 자랑스럽게. p.159
사실 그녀가 이렇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게 된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그녀가 그와 함께하는 결혼생활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주지 못했으니까. 따라서 그녀가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 그가 따라갈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은 옳은 일이었다. p.168
스토너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서 싹을 틔웠던 희망이 태어날 때처럼 갑작스레 죽어버렸다. 순간적으로 몸이 정말로 아픈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탁자를 내려다보니 양팔 사이의 반짝이는 호두나무 탁자 상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탁자 상판이 어두워서 이목구비가 구분되지는 않았다. 딱딱한 탁자 속에서 실체가 없는 유령이 희미하게 빛을 내며 그를 만나러 오고 있는 것 같았다. p.219
'대학이 소외된 자, 불구가 된 자들이 세상에서 도망칠 수 있는 피난처라는 얘기를 했어. 하지만 그건 워커 같은 치구들의 이야기가 아니었지. 데이브라면 워커를... 세상으로 보았을 걸세. 그러니까 그 친구를 허락할 수가 없어. p.235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이 말을 하고 나자 갑자기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자기 말에 담긴 진실을 느낀 그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절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절망이 그토록 무거웠다는 것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이 들뜨다 못해 현기증이 날 것만 같고,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그는 다시 말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p.264
스토너는 그레이스가 직접 말했던 것처럼 절망을 거의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레이스는 해가 갈수록 술을 조금씩 더 마셔서 공허해진 자신의 삶에 맞서 스스로를 무감각하게 만들면서 하루하루를 조용히 살아갈 터였다. 그는 그녀에게 적어도 그런 생활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p.351
갑자기 그녀가 바로 옆방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와 함께 있다가 온 것 같았다. 방금 그녀를 만졌던 것처럼 손이 저릿거렸다. 그 상실감, 그가 너무나 오랫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그 상실감이 쏟아져 나와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의지를 넘어 그 흐름에 휩쓸리는 자신을 내버려두었다. 자신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기억을 향해 미소 짓는 것처럼. 이제 자신은 예순 살이 다 되었으므로 그런 열정이나 사랑의 힘을 초월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초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초월하지 못할 것이다. 무감각, 무심함, 오연함 밑에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강렬하고 꾸준하게. 옛날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다. 젊었을 때는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그 열정을 주었다. 아처 슬론이 자신에게 보여준 지식의 세계에 열정을 주었다. 그게 몇 년 전이더라? 어리석고 맹목적이던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에는 이디스에게 그 열정을 주었다. 그리고 캐서린에게도 주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열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있어. p.353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의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 이디스의 손이 그의 몸을 오가며 씻어주는 것이 느껴졌다...이제야 저 사람이 돌봐줄 수 있는 아이가 생겼어. 그는 그녀에게 말을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생각했다.
...학생들 몇 명이 뒷마당 잔디밭을 가로질렀다...그들은 잔디밭에 거의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걸었다. 그래서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조용한 여름날 오후에 어딘가 멀리서 아무것도 모른 채 터뜨리는 웃음소리.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그를 가둬주기를, 공포와 비슷한 그 옛날의 설렘이 그를 지금 이 자리에 고정시켜주기를 기다렸다. p.387-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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