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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Talk

KAIST 김정진 교수님의 서양음악사 - 6. 낭만파 시대(Romantic Era, 1820 ~ 1900)

음악적인 형식과 이론의 완성을 이뤄낸 클래식 시대의 뒤를 이은 Romantic Era...
낭만파 시대(Romantic Era) 라는 제목 아래 교수님은 "Program and Nationalism Music" 이라는 부제를 다셨다. 이 두가지를 아우를 수 있는 또다른 키워드는 '개인-개성' 이 아닐까? 모든 예술 장르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이지만 낭만파는 개인의 감정(emotion)을 중요시 한다. 기존 classical era에서도 emotion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지만 전 시대가 정리되고(order) 균형잡히고(poise), 평온한(serenity) 음악을 추구했다면 이 시대는 독특하고(strangeness), 경이롭고(wonder), 황홀한(ecstasy)  음악을 추구했다. 또한 그냥 감정이 아닌 "개인의 김정(Personal Feelings)"이다.

시대상 : 프랑스 혁명
이러한 특징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과 때어 놓을 수 없다. 프랑스혁명과 함께 민주주의가 들어왔고, 이로 인해 음악은 왕과 귀족 등의 특권 계층(Royal Family)를 위한 유흥(Entertainment)이나 교회 등을 위한 것이 아닌 개인을 위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는 Music School이 탄생한 시기이기도 한데, 이 것 역시 사회의 변화의 한가지로 일반인들도 표준화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곡가가 아닌 유명 연주인(Star Performer)이 탄생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작곡가들은 대부분 먼저 연주인으로서 명성을 날렸거나, 그렇게 되고자 했었다고 한다.

Program Music
프로그램 음악이란 기악음악(Instrumental music)이면서도 그 속에 문학적이고 회화적인 요소들을 포함하는 음악이다. 결국 어떤 메세지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특징은 기존의 절대 음악(Absolute music, pure music)과 이 시대의 음악을 구분 짓는 중요한 차이가 된다. 슈만은 다음 말을 들으면 프로그램 음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화가는 시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음악가는 그림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The painter turns a poem into a painting ; the musicians sets a picture to music.” – ROBERT SCHUMANN

Music Nationalism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음악에 만족을 하지 못한채 자라난 작곡가들은 그들 자신만의 음악 - 민속음악이나 춤곡, 자기 민족의 설화 등을 기반으로 한 음악 -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낭만파 시대 음악가들
슈베르트, Franz Schubert (1797-1828)
- 600 lieder(german art song), 9 symphonies, 15 string quartet, many piano music
가장 불쌍했던 음악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고 31세의 나이로 요절.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슈베르트에 대한 일화 참조.
슈만, Robert Schumann (1810-1856)
- Great lied composer …
음악을 통해 그 음악가의 정신적인 상태를 알 수 있는데, 다른 음악들은 Modulation이 잘 된 음악이라면 그의 음악은 이리 저리 왔다갔다 하는 느낌이 든다. Key도 없고 음도 여기저기 나타나서 흐름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작곡가 뿐만아니라 훌륭한 평론가로 쇼팽, 브람스의 재능을 보고 세상에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쇼팽, Frederic Chopin (1810-1849)
wrote exclusively for the piano … wrote exclusively for the piano …
expanding the instrument’s musical and poetic capabilities …
폴란드의 국민 작곡가로, 폴란드적인 음악들을 많이 작곡했다.
브람스, Johannes Brahms (1833-1897)
Classic in construction… Romantic in sound ….  & yet very individualistic …
Cutting edge composer …
"그의 음악은 듣고 싶지 않다. 그의 음악은 연주하고 싶다. 그 이유는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 김정진 -
그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감성적인(Romantic) 부분 때문인데...그의 가슴 속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있었으니....그의 스승인 슈만의 아내, 클라라 슈만.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로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음악을 Copy하는 데에도 천재였다고 한다.
차이코프스키, Peter Illyich Tchaikovsky (1840-1893)
Best known composer of Ballet classic…
Full of  angst and theatrical displays of emotion …


ROMANTIC

□ Brahms

1.Symphony No.3 in F major, 1st mov

 

1악장 (Allegro con brio)

□ Schubert

1.Symphony in B minor, 1st mov

슈베르트 교향곡 제8번..

"미완성"이란 부제로더욱 유명한 이 곡은 슈베르트가 25세 때 작곡하였으며 그의 생전에는 연주되지 못하다가 슈베르트 사후 37년 만에 초연되었다.보통 교향곡은 4악장으로만 이루어지는것이 일반적인데 이 곡은 2악장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완성"이란 부제가 붙여졌다.

이 곡은 지극히 투명 청순함과 아름다운 선율이풍부하게 씌여진점, 가락과 화성과 음색의 용법이 참신하다는 점이 특색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까지 가장 인기있는 교향곡의 하나로손꼽히고 있는 것이다. 미완성에 그친 곡일지라도 이 곡은 형식적인 균형과 낭만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는 명곡이며, 낭만파 음악의금자탑이기도 하다.

 

 


□ Mendelssohn

1.'Scherzo' &'Nocturne' from A Midsummer Night's Dream

일년 중 낮이 가장 긴 하지 무렵의 성 요한제(6월24일) 전야를 시간적 무대로 하여 요정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익살스러운 사건을 내용으로하는 세익스피어의 희곡 <한 여름밤의 꿈(A Midsummer Night'sDream)>에는 여러 음악
들이 극부수음악으로 채택 되어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멘델스존의 <한 여름밤의 꿈>이 작곡됨에 따라 희곡의 극음악은 멘델스존의 작품 으로 정착되게 되었다.
그중 <서곡>은 1826년에 작곡되었고, 나머지 12곡은 1843년에 프러시아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명에 의하여 쓰여진 것으로서 서곡(Overture) 스케르쪼(Scherzo) 간주곡(Intermezzo)야상곡(Notturno) 결혼행진곡(Wedding March)의 다섯곡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곡들이다.
특히 결혼행진곡은바그너의 혼례합창곡과 함께 오늘날의 일반 결혼식에서 연주될 만큼 통속화된 명곡이기도 하다. 고전적인 작곡양식을 취하고는 있으나,낭만적인 멋과 우아한 아름다움이 특징인 한 여름밤의 꿈은 바이올린 협주곡과 함께 멘델스존의 모든 작품을 통해서 가장 사랑받아온걸작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서곡과 나머지 곡들의 작곡시기에는 17년의 시간적 차이가 있음에도 그런사실이 전혀 의식되지 않을 만큼 훌륭한 조화가 이루어져 있다.

 

 


   
 

2.'Wedding March' from A Midsummer Night's Dream


□ Chopin

1.Nocturne in E major, Op.9 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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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re]

슈베르트 이야기
가곡의 왕

슈베르트의 일생은 예술가의 슬픈 운명을 생각하게 하는 대표적인 경우의 하나이다.
그 아름다운 선율로 만인의 가슴에 위안을 안겨 준 사람이, 그 자신 이승을 산 세월은 31년밖에 안 된다.
그 짧은 생애에 가곡만 해도 6백 곡 이상의 작품을 만들어 냈는데, 그가 일생을 통해서 얻은 보수는 570파운드에 지나지 않았다.
그 재능에 어울리는 무대에 오른 일은 한번도 없었다.
오늘날 누구나 알고 있는 <미완성 교향곡 >이나 은 그의 생전에는 한 번도 연주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처럼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한 남성의 영혼에 대하여 참으로 헌신적인 사모를 바친 여성은 여러 가지 전설에도 불구하고 아마 하나도 없었다는 게 사실인 것 같다.

프란츠 슈베르트는 1797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인에서, 소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4남매의 13번째였다.
그 중의 아홉은 요절을 했지만, 어린 시절의 슈베르트가 얼마나 궁색한 살림 속에서 자랐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가정에는 음악이 있었다.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여 슈베르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저녁에는 식구들이 모여서 합주를 했다.
이따금 소리가 섞이면 그 것을 맨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슈베르트였다.
슈베르트는 누가 어떻게 틀렸다는 걸 지적하지는 않고, 다만

"아버지 어디가 좀 이상해요"

라고 말했다.
11세 때 콘빅트 신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등록금도 없고, 관비(官費)로 생도를 모두 기숙사에 수용했으므로 생활비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나 궁정에서 합창하는 가수를 양성하기 위해 음악을 가르치고 있었다.
슈베르트는 여기서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 같은 거장들의 음악을 들었으며,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작곡을 시작 했다.
그는 작곡을 위한 음악 이론을 충분히 배우고 있지는 않았으나,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악상을 오선지에다 적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절로 이론에 맞아 있었다.
오선지가 없으면 잡기장에도 쓰고, 헌 봉투지에도 썼다.

16세 때 목소리가 변하여 합창 대에서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콘빅트 신학교에서 사범학교로 옮겼다.
그리고 이듬해부터는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는 소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ABC를 가 르치는 조교사가 되어 3년간 견디었다.
교실에서 산수를 가르칠 때 흑판에다 쓰는 글씨가 절로 악보로 변했다는 얘기―모든 전기에도 나오고 영화 장면에도 나오는 유명한 전설은 이 때 일이다.
간신히 3년을 견딘 끝에 드디어 그는 자유로운 작곡가 생활로 들어갔다.
자유롭고도 가난한.....

슈베르트에게는 콘빅트 시대에 안 슈파운을 비롯하여 다정한 몇 명의 친구들이 있었다.
시를 쓰는 친구, 그림을 그리는 친구, 노래를 부르는 친구, 그들은 선술집에 모여서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교외에 나가서 슈베르트가 작곡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무명(無名)이나 다름없는 취미의 예술가에 지나지 않았으나 즐겁고 진실한 모임이었다.
슈베르트의 모든 노래는 그러한 현실의 생활과 정서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슈베르트의 생애에서 가장 얘깃거리가 되는 것은 얼마 동안 가정교사로 가서 피아노를 가르친 에스테르하지 백작의 딸 카로리이네와의 연애 사건이다.
그 얘기는 영 화 <미완성 교향악>에서도 그럴 듯하게 꾸며져 있지만, 전기 작가들의 연구에서는 사실 무근으로 밝혀지고 있다.
로맨스는 없었다. 슈베르트는 그 귀족의 집에서 하인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을 뿐이며, 비인에 돌아오자 불쾌한 경험을 잊어버리기 위해 친구들과 더불어 축배를 들었다.

또 한 가지 슈베르트가 베토벤을 직접 만난 일이 있다는 얘기에 관해서도 전기 작자에 따라 해석이 구구하다.
1827년 베토벤이 병석에 누웠을 때 문병을 갔다는 얘기인데, 베토벤이 슈베르트가 작곡한 악보를 보고서 칭찬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만난 일이 있는지 어떤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베토벤이 작고하자 그 장례식의 횃불 행렬에 슈베르트가 참가한 것은 확실한 사실로 되어 있다.
그날 밤 선술집에 돌아온 슈베르트는 땅속에 잠든 거장의 명복을 빌어 건배를 하고, 다음에는 그 뒤를 따르는 자를 위해 건배를 했는데, 제일 먼저 베토벤의 뒤를 따를 사람은 다름 아닌 슈베르트 자신이었다.

바로 그 이듬해 가을, 하늘이 이승에 내린 '가곡의 왕' 슈베르트는 그 불멸의 가곡 집 <겨울 나그네>를 남기고, 보리수에서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것처럼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가 죽거든 베토벤 옆에 묻어 달라"

는 것이 마지막 부탁이었다.

슈베르트가 죽은 하숙방에 남아 있었던 물품에 대해서는 상세한 목록이 작성되었는 데, <미완성 교향곡>과 의 원고도 그 속에서 발견되었다.


베토벤과의 불발로 끝난 만남

이 1822년에 슈베르트는 전부터 가장 사숙(私淑)하고 있던 베토벤과 접촉할 뻔한 일이 있다.
그는 <프랑스 민요에 의한 피아노 연탄용의 여덟 개의 변주곡>을 작곡했다.
그것은 [베토벤에게 바침, 그 숭배자이며 찬미자인 프란쯔 슈베르트로 부터]라는 헌사로 발행되었다.
슈베르트는 유명한 음악가에게 손수 주고 싶었으리라.
그 일부를 가지고 베토벤의 집을 방문했다.
운 나쁘게도 주인이 없어서 슈베르트는 머슴에게 주었다.
두 예술가가 만날 기회는 이리하여 잃어진 것이다.
회상록이며 전기류의 작가들은 상상으로 슈베르트와 베토벤의 관계에 온갖 일화를 달아 붙였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슈파운의 뚜렷한 증언이 있다.


"슈베르트는 이따금-특히 대가(大家)의 임종 때에-베토벤과 만나지도 이야기 해 보지도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가슴속에 멍이 들게 했다."

또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가까워지면 대단한 행복을 느꼈을 터이지만 베토벤은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요제프 퓌텐브레너도 단언하고 있다.
슈베르트는 <변주곡>작품 10번을 인쇄한 것을 베토벤에게 가지고 갔으나 대가는 집에 있지 않았다.
카르르〔베토벤의 조카]와 신틀러는 그 작품을 베토벤이 칭찬 했다고 거듭 말하고 있다.
2년간 베토벤은 거의 매일같이 그 곡을 조카와 함께 치고 있었다.
그러나 슈베르트 자신은 절대로 베토벤과 접촉한 일이 없다.
그들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해후(邂逅)는 베토벤의 죽음의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나도 안세름 텔쳐와 함께 그 자리에 임석했다.
신틀러가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베토벤은 분명히 이 <변주곡>에 의하여 슈베르트를 안 것이다.

"이 사나이는 오래 잖아 나를 따라 넘을 것이다"

라는 말을 실제로는 결코 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되지만, 그 말은 비인 전시(全市)에 퍼져 젊은 작곡가의 명성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