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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맥서점/2008

농담 - 밀란 쿤테라, 1965


농담  본문보기
밀란 쿤데라 | 방미경 | 민음사 | 1999.06.01
평점119건 | 네티즌리뷰 107건 | 최저가 5,600원 구매하기
책소개 : 이 책은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문제작가 밀란 쿤데라의 처녀작이다. <농담>은 쿤데라 문학의 사상적 근원을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이다. 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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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처음 만났던 밀란 쿤테라.
그의 처녀작이었던 '농담'을 통해서도 그의 문체와 인간 내면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느낄 수 있었다.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패러다임을 통해 동일한 상황을 얼마나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의 필체는
삶에 대해서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해준다.
이번 소설은 특히 사회주의와 사랑, 종교, 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을 각기 다른 등장인물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농담'으로 썼던 엽서 한장으로  사회주의의 '적'이 되어버린 '루드빅',
'찬사'를 먹고 사는 남편에게 지쳐 '사회주의'와 새로운 사랑을 통해 탈출구를 찾을 수 밖에 없도록 내몰린 '헬레나'
단지 '민속예술'을 지키고 싶었던 야고슬로브
'신'의 뜻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코스트카'
소설에서 화자가 되지는 못하지만 '찬사'를 위해 변해가는 '제마넥'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캐릭터이다.

저자는 '사회주의'를 표현하기보다는 '사회주의' 운동이 각기 다른 인간의 내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각 사람의 입장에서 그려나가면서 그의 생각을 전하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며 느낀 것은 그가 표현한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들은 사회주의가 아닌 다른 어디서든 -
민주주의든, 자본주의든, 종교든, 문화든, 세대든 - 볼 수 있는 현상들이라는 점이었다.
사람이 살고 있다면 어디서라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고 동감을 가져다 주긴 하지만,
그의 글을 읽고 나면 왠지 허무주의에 빠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파올로 코엘료의 이야기가 단순하고 비현실적인 낙관주의의 '빛'이라면,
밀란 쿤테라의 이야기는 복잡하기 그지 없지만 현실적인 '어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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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코스트카에게서 이 다른 점을 좋아했고, 그와 논쟁을 하면, 나는 정말 누구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언제나 확인할 수 있어서 그와 이야기를 하누는 것이 좋았다.(p.17)

그 리고 내 몸은 허공 속에 사라지고 오로지 손가락들이 와서 닿는 얼굴만이 인식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감미로운 두 손이 내 머리를 몸통에 갖다 붙이려는 생각은 전혀 없이 단지 머리 그 자체로만 여기는 듯 들고 (돌리고, 애무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제 옆 탁자에서 기다리고 있는 날카로운 면도날이 내 머리의 그 아름다운 자율성을 완성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스르르 들었다.( p.19)

파벨은 언제나 박수를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외동아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사진을 곁에 두고 잔다, 신동이었으나 이제 그저 평범한 어른, 그는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혼호 없이는 살지 못하는 사람, 그것이 그의 알코올이고 니코틴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했으면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리고 흐느꼈을 만큼 그렇게 열정적으로 스탈린의 끔찍한 재판에 대한 연설을 하여 청중의 폐부를 찌를 수 있어서 그는 황홀했던 것이다, 나는 그가 그토록 분노하면서 얼마나 행복해하는가를 느꼈다, 그리고 그를 증오했다.( p.32)

무력감, 의심, 불신의 씨앗들, 소리없이 은밀하게 퍼져나가는 수많은 그 씨앗들, 전보다 더 긴밀하게 당에 열중하는 것 외에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살아 숨쉬는 생명체인 것처럼, 당은 내가 파벨에게만이 아니라 결국 그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그때, 내가 마음을 맞길 수 있는 존재인 셈이었다.( 33)

나는 여자애들이 정말 끔찍하게 싫다, 젊음 속에서 잔인한 저 어린 여자애들, 마치 자기들은 언젠가 서른, 서른다섯, 마흔 살이 되지 않을 것처럼,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이 먹은 여자에 대해 일말의 연대감도 없는 그런 여자애들..(35)

그때는 <48년 2월> 이후 첫 해였다. 새로운 삶,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어 있었고, 내 기억 속에 박힌 그 새로운 삶의 못브은 경직되고 심각한 것이었는데, 그 심각함이란 조금도 어두운 데가 ㅇ벗고 오히려 미소 띤 겉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다, 그 시절은 그 어떤 때보다도 기쁨이 넘치는 떄라고 스스로 선언하고 있었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즉시 노동 계급의 승리를 애통해하는 자라거나 또는 개운주의자로서 자신의 내밀한 슬픔 속에 빠져버리는 자(이런 과오가 덜 심각한 것은 아니다) 라는 의심을 받았다.
그 시절에 나는 내밀한 슬픔 같은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장난기가 상당했지만, 그래도 그 시대의 즐거움에 비추어서는 제대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내 농담들은 너무 진지한 데가 없었는데, 당시의 기쁨은 해학이나 아이러니를 용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기쁨은, 다시 말하지만 <승리에 찬 계급의 역사적 낙관주의>라고 자랑스럽게 지칭되는 기쁨, 금욕적이고 장엄한 기쁨, 한마디로 환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46)

그렇다면 그 시절에 나는 정말 누구였을까?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아주 정직하게 답하고 싶다. 나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48)

모든것이 진짜였다. 나는 위선자들처럼 진짜 얼굴 하나와 가짜 얼굴 하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젊었고, 내가 누구인지 누가 되고 싶은지 자신도 몰랐기 때문에 여러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얼굴들 사이에 존재하는 부조화가 내게 두려움을 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중 어느것에도 꼭 들어맞질 않았고, 그저 그 얼굴들 뒤를 맹목적으로 이리저리 헤매다니고 있었다.)(49)

사랑이라고 하는 것의 심리적, 생리적 구조란 너무도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삶의 어느 시기에 있어서 젊은 이는 그것을 통제하는 데에만 거의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때가 있고, 그래서 그런 젊은이에게 사랑의 대상 자체, 즉 사랑하는 여인은 증발해 버리고 만다.(어린 바이올린 연주자가 자신이 연주하는 동안 손을 움직이는 기법 같은 것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 기법을 숙달하기에 이르지 않는 한 작품의 내용에 집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르케타를 생각할 때 내가 중학생 아이처럼 마음이 설레었다는 말을 했는데, 그 감정은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유래했다기보다 내가 서투르고 자신감이 없었으며, 그것이 내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러 마르케타 자체보다도 훨씬 더 내 감각과 생각들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49)

이 문장들은 내게 공포의 주제가 되었다. 허풍기 서린 가면을 쓰고 있으나 그 문장들은 어쩌면 정말로 대단히 심각한 어떤 것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결코 당의 내부와 일체가 되어 섞인 적이 없다거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였던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단지 단순한 결정에 따라 <혁명가들에게 다가간> 것이라는 사실 등을 말이다.(혁명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말하자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로 느껴졌다. 혁명가다 하면 혁명 운동과 일체가 되는 것이며, 또 하나는 혁명가가 아닌 경우로 다만 혁명가이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끊임없이 자신이 혁명과 일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죄의식을 느낀다.)(69)

나는 인간의 운명을 심판하는 최고재판소에 비치된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도저히 바로잡아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이 이미지(아무리 나와 비슷하지 않다 해도)는 나 자신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더 실제적이며, 그것은 결코 나의 그림자가 아니라, 나, 바로 나 자신이 내 이미지의 그림자였다. 왜 나를 닮지 않았냐고 그 이미지를 탓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며, 이미지와 다른 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리고 이 다름은 바로 나의 십자가, 그 누구에게 떠넘길 수도 없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으로 선고받은 십자가였던 것이다.(77)

담쟁이 덩굴이 우거진 작은 집도 수양버들도 이런 장소들에 속하지 않듯이, 아무데로도 이어지지 않는 짧은 길들, 서로 이질적인 건 물들이 들어찬 그 길들이 그 장소들에 속하지 않듯이, 나 또한 거기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납작한 판잣집들로 가득한 이 흉측한 지역이 지난날 쾌적한 시골이었던 이 장소들에 속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이곳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바로 내가 이곳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이 경악할 만한 부조화의 도시, 이질적인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무자비하게 끌어안고 있는 이 도시,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하는 내 자리라는 것을..(96)

그렇다, 그토록 나를 매혹시켰던 것은 루치에의 그 특이한 느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둘러 돌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란 없다고, 무언가를 향해 초조하게 손을 내미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체념한 마음을 발산하는 그 느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랬다, 그 아가씨가 매표소로 가서 동전을 꺼내고, 표를 사고, 관람실을 한번 보고는 다시 마당으로 나오는 동안 계속 나로 하여금 그녀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마도 정말로  그 우수로 가득한 느림 때문이었을 것이다.(99)

슬픔, 우울의 곰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그 가까움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말없이 고요하게 서로 감정을 공유하는 이런 분위기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방어도 잠들게 하며, 섬세한 영혼도 속된 자도 모두 감지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드는 방식 중 가장 쉬운 것이면서 반면에 가장 드문 것이기도 하다. 그러자면 자신 속에 형성되어 있는 정신적 태도라든가 꾸며낸 행동과 몸짓들을 버리고 아주 단순하게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내가 (단번에, 준비도 없이)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수많은 가짜 얼굴들 뒤에서 눈먼 사람처럼 늘 길을 더듬던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것은 기대하지 못했떤 선물, 기적 같은 해방으로 느껴졌다.(103)

그러나 오늘날 나는 그를 무엇보다, 한 젊은이로, 연기를 하는 한 사람으로 보게 된다. 어찌 됐거나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 그리고 연기를 한다.(129)

젊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희랍 비극 배우의 장화에 다양한 무대 의상 차림을 하고,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 광적으로 신봉하는 대사들을 외워서 읊으며 누비고 다니는 그런 무대이다. 역사 또한, 미숙한 이들에게 너무도 자주 놀이터가 되어 주는 이 역사 또한 끔찍한 것이다. 네로라는 풋내기, 나폴레옹이라는 애송이, 흥분하여 날뛰는 수많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흉내내는 열정이나 간단하게 맡아버린 역할들은 처참하도록 실제적인 현실로 변형되어 나타난다.(130)


우리는 오로지 상황의 압력과 자기 보존 본능 때문에 가축떼처럼 똘똘 뭉쳐 우글우글 몰려 있는 것일 뿐이며, 그런 식의 연대 의식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의심스러워졌다. 그리고 우리 검정 표지 집단이 예전의 그 강당에 모여 있던 집단과 똑같이, 아니 어쩌면 이 세상 모든 집단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몰아낼 수 있다(유배 보내고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170)

우리가 할 일 앞에는 드넓은 지평선이 열려 있다. 저속한 음악 문화, 부르주아가 사람들에게 주입시킨 저 진부하고 시시한 유행가 일색의 통속 문화를 정화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본래의 인민 예술로 대체시키는 일이 우리의 할 일이다.
묘한 일이다. 루드빅이 그때 말한 것은 가장 보수적인 모라비아 민족주의자들이 오래도록 꿈꾸었던 유토피아였던 것이다.(199)

시 인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자기에게만 있는 유일한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하여 시를 쓴다. 그러나 민속 노래를 통해서 사람들은 남과 구별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섞이려고 한다. 그것은 종유석처럼 형성된다. 새로운 모티프, 새로운 변형들이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져 덮이면서 민속 노래가 형성되는 것이다. 노래하는 사람마다 새로 어떤 요소를 덧풑이는 가운데 그 노래는 대대로 전해 내려간다. 그러니까 이런 노래들을 지은 사람은 여러 명인데, 그들은 모두 자기가 한 공헌 뒤로 겸허하게 사라져 버렸다.(203)

공산당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하고자 애썼다. 그들은 스탈린이 새로운 예술에 대해서 내린 그 유명한 정의, 즉 민족적 형식 속에 담긴 사회주의적 내용이라는 정의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음악, 우리 춤, 우리 시에 이 민족적 형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민속 예술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204)

그러자 그 노인은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친애하는 족장 어른,
이 진실된 구혼자는 왜 이 진실된 아가씨를 신부로 맞이하려 하는지요
꽃을 위해서인가요, 열매를 위해서인가요?'
족장은 답했다.
'누구나 다 알지요, 아름답고 찬란하게 꽃은 피어나고 우리를 기쁘게 한다는 것.
하지만 꽃은 달아나고
열매가 오지요.
그러니 우리가 신부를 맞이함은 절대 꽃 때문이 아니라 열매 때문이라오,
열매는 우리의 양식이니까.
(211)

세상에, 어떻게 하여 이 조그만 화관의 기억이 우리의 최초의 포옹보다, 블라스타의 진짜 혈흔보다 더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일까?.....
우 리의 삶의 모든 중대한 순간들은 단 한번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속임수를 써서는 안된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척해서도 안된다. 현대인은 속임수를 쓴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중대한 순간들을 모두 교묘히 피해 가려 하고,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은 채 탄생의 순간에서 죽음까지 가려 한다. 민중은 휠씬 정식하다. 그들은 중대한 상황을 맞을 때마다 상황의 가장 깊은 곳으로 노래를 부르며 내려온다.(213)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므로(228)

나는 한 여자를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의 등장 인물로서 사랑한다. 햄릿에게 엘시노어 성, 오필리아, 구체적 상황의 전개, 자기 역할의 <텍스트>가 없다면 그는 대체 무엇이겠는가? 무언가 알 수 없는 공허하고 환상 같은 본질 외에 그에게 무엇이 더 남아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루치에도 오스트라바의 변두리가 없다면, 철조망 사이로 밀어넣어 주던 장미, 그녀의 해진 옷, 희망 없던 내 오랜 기다림이 없다면, 내가 사랑했던 루치에가 더 이상 아닐지도 모른다.(232)

내가 얼마나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가 하면, 누가 자기를 무어가 좋고 무어가 싫다는 등의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으면 그것을 절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람이 드러내고 싶어하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이다.(257)

나는 붉은 군대의 사샤니 하는 이야기를 단 한순간도 믿지 않았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실제의 인물은 파벨 제마넥의 과장된 제스처 되로 스러져버리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런 과장된 제스처를 통해 이 인물은 제마넥 자신의 삶에 있어 전설적인 인물로, 성스러운 동상으로, 감동의 도구로, 그의 아내가 (그 자신보다도 분명히 더 줄기차게) 죽을 때까지 (열정적으로 그리고 도전적으로) 경배해 마지않을 감상적인 이야기와 연민의 대상으로, 그렇게 바뀌어버렸을 것이다.(270)

서로 낯선 두 육체가 한데 섞이는 것, 이것은 드물지 않다. 떄로는 영혼의 결합까지 일어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육체가 자신의 영혼과 결합하고 일치를 이루어 정념을 공유하는 일은 천 배는 드문 일이다.(279)

교 회는 노동 운동이 모욕당한 이들과 정의를 갈구하는 이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교회는 그들과 더불어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지상에 하느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교회는 압제자들과 연합하여 노동자 운동에서 하나님을 들어내 버렸다. 그러고는 이제 와서 그 운동에게 하나님이 없다고 비난을 하려 드는 것이다. 이 얼마나 바리새인 같은 위선인가! 사회주의 운동이 무신론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거기에서 우리에 대한 신의 비난을 본다! 가난한 이들과 시련을 겪는 이들에게 우리가 마음을 베풀지 않는 데 대한 비난을(297)

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는 정신적 흐름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사회 평등과 사회주의로 이어진다고 굳게 믿습니다....그러니까 사람은 보다 높은 것, 보다 초개인적인 어떤 것을 위하여 자신의 자아, 이익, 사적인 삶을 포기했던 겁니다. 마르크시즘의 테제들은 물론 속세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서 발견된 의미는 복음서와 성서의 가르침의 의미에 비견될 만합니다. 그렇게 해서 침범할 수 없는, 그러니까 우리 용어로 하자면, 신성한, 일련의 이념들이 생겨난 것이죠.(312)

인간은 혼자서는 용서하지 못하며, 그것은 애초부터 그들의 능력 밖의 일이다. 그들은 범해진 죄를 무화시킬 힘이 없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죄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고, 시간을 지워버리고,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을 무로 변화시키는 것,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초자연적 행위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법칙을 벗어나시기 때문에, 그분은 자유자재하시므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으므로, 오직 그분만이 죄를 씻어주실 수 있고, 무로 변화시켜 주실 수 있으며,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신의 죄사함에 의지해서만이 인간을 용서할 수 있다.(323)

아무것도 용서되지 않는 세상, 구원이 거부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으니까요. 루드빅, 당신은 지옥에서 살고 있습니다.(324)

나 의 회의가 우리 사이에 가로놓여졌다. 나는 내가 루치에에게 주었던 정신적 도움이 이제 그 정체가 드러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은 그녀가 처음 내 앞에 나타났던 그 순간부터 이미 나는 그녀를 육체적으로 원했다는 느낌. 위로의 말을 하는 사제로 변장하고서 실은 여자를 유혹하는 사람같이 행동했다는 느낌.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그 모든 훌륭한 설교들이 오로지 가장 저열한 육체적 욕망을 감추는 겉옷에 지나지 않았따는 느낌.(328)

당신은 광부, 나는 벽돌공,. 우리의 운명은 상당히 비슷한데 우리 둘은 얼마나 다른가요! 나는 용서하며 사는데 당신은 화해할 줄을 모르고, 나는 평화적인데 당신은 반항적이에요. 우리는 겉으로는 그토록 닮았는데, 저 깊은 곳에서는 서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요!(331)

아아,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을 속이고 있는가! 나의 길이 올바르다는 확신 속에서 이렇게 편집증 환자처럼 완고해지고 있다니! 신앙인이 아닌 사람을 앞에 두고 내 신앙의 힘을 자랑하다니!(336)

코스트카가 알려준 바에 의하면, 실은 나는 루치에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던 것이고, 그러므로 그토록 여러 해 동안이나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의 모습을 그려왔던 것이니 말이다....그녀가 실제로 누구인지, 그녀 자체로서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어떤 사람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존재를 오로지 (청년기의 자아중심주의에 빠져 있었던 탓에) 나에게로 (나의 고독, 나의 예속, 애정과 사랑에 대한 나의 욕구로) 곧바로 향해 있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였다. 내 삶의 이 구체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모든 것, 그 자체로서의 그녀의 모습은 모두 간과되었던 것이다.....이미 오래전부터 느겨는 나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 모르는 사람이다.(343)

<왕들의 기마 행렬>은 신비롭기 짝이 없는 의식이다. 그 누구도 그것의 의미와 전언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마ㅣ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그것을 읽지 못하는 (그리고 그 글자를 환상적인 그림으로밖에 파악할 수 없는) 사람들에ㅐ게 한층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처럼, 아마 <왕들의 기마 행렬>도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이미 오래전부터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자체에, 그 모습과 형태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킴으로써 그 몸짓과 색깔들 그리고 대사들이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되기 떄문에 그렇게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360)

이런 허영에 찬 말들 속에서 나는 내가 예전에 알았던 제마넥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의 내용은 나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제마넥은 예전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버린 것 같아 보였고, 만일 내가 현재 그의 주위에 살고 있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의 편에 서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372)

내 인생의 모든 일들을 전부 최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일들을 초래한 실수들이 내가 한 실수들이 아니라면 무슨 권리로 내가 그것을 취소할 수 있겠는가? 사실, 내 엽서의 농담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을 때, 잘못했던 사람은 누구인가?.......이런 실수들은 너무도 흔하고 일반적인 것이어서 세상의 이치 속에서 예외나 <잘못>도 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순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한 것이란 말인가? 역사 자체가? 그 신성한, 합리적인 역사가? 그런데 왜 그런 실수들이 역사 탓이라고 해야만 할 것인가? 인간으로서의 나의 이성에만 그렇게 보일 뿐, 만일 역사가 자기 고유의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 떄문에 그 이성이 인간들의 이해를 신경쓸 것이며 여선생처럼 꼭 진지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역사가 장난을 한다면?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완전히 무화시켜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392)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 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자동 보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움직인다.)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예전의 얀이 아닌 다른 얀이 역시 예전의 제마넥이 아닌 다른 제마넥 앞에 서 있는 것이며, 내가 그에게 날려야 하는 따귀는 다시 되살릴 수도 다시 복구할 수도 없이 영원히 사라져보리고 만 것이다.(396)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 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모든 것은 잊혀지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질 것이다.(399)

우리 둘(루드빅, 루치에)은 서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 비껴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우리의 삶은 둘 다 모두 유린의 역사라는 점에서,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나 결혼한 부부와 같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425)